소라넷 폐지 운동 제 경험을 남기기로 했습니다.

브런치 발행글 

글을 쓰고자 하는 결심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나는 이 글을 쓰기까지 오랜 시간 고민을 반복해야만 했다.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이야기는 무엇일지,

어떤 이야기가 그들에게 도움이 될지 말이다. 나는 나의  경험을 정리하며 힘이 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여성들에게, 큰 야망을 꿈꾸라! 앞으로 전진하라! 그리 말하는 글 말이다.

 나는 그런 ‘글’을 쓸 생각만으로도 벅찬 감정이 차올라 책상에 앉았지만 나의 손에서 그런 글이 써 내려 가지지 않았다. 그렇게 써지지 않는 글을 오랫동안 방치했다.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한강 변을 달리고 있었다.

 일자로 쭉 펼쳐진 도로에서 앞서가는 사람들을 추월했다. 이유 모를 성취감에 계속 앞사람을 추월하다가, 결국 경주용 자전거를 탄 사람들에게 추월당했다.

 그렇게 추월을 당하자 오기가 생겼다. 따라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악착같이 기어를 올려 발을 굴렀지만 난 결국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저 멀리 자전거를 탄 사람이 사라지고, 이유 모를 패배감에 휩싸여 있던 나는 문득 내가 하는 행동이 너무 우스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단순히 다른 목적지와 다른 이유를 가진 사람들을, 같은 길 위에 있다는 이유로 혼자 추월하고 경쟁하고, 패배하고 우울해하고. 낙담하고.  이 세상 어딘가 나와 같은 우스운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내가 추월하는 것도, 나를 추월하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주변 풍경을 돌아보며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달리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달린 덕에 한 시간이나 일찍 목적지에 도착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할 일을 잃고 떠돌다가 아무도 없는 카페에 앉아 혼자 사색에 빠졌다. 그 상황 속에서, 사회 속의 나와 우리들이 떠오른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가 어디에, 언제, 무엇을 위해 가야 하는지 모른 채 그저 앞으로 나가며 추월당하고 추월함에 만족과 패배감을 느끼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또, 마침내 도착한 그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기에 한 번 더 깨닫는다. 전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가 어떤 길을 가고 있었는지 마침내 도착하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나조차도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모른 채 그대로 경쟁을 위한 경쟁만을 반복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사회 속에서, 삶 속에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이며. 어찌하여 그리 열심히도 가고 있는 걸까?


 분명 처음에 이 일을, 단체 일을 시작한 시점에 나에게는 분명 뚜렷한 목적지가 있었던 것 같다.

10명의 사람에게 디지털 성폭력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5명의 사람이 안다고 말하는 한국

나는 그런 한국을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달렸고 어쩌면 나는 목적을 이루었고, 목적지를 지나쳤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모든 것을 잊고 전진을 위한 전진만을 반복한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은, 어쩌면 온몸으로 부딪히는 것이다.

  ‘소라넷’이 성인 사이트로서 당당히 군림하고 있던 그때. 소라넷 폐지 운동을 하는 것은, 디지털 성폭력 운동을 하는 것은 새로운 길을 뚫는 일이었으며 그렇기에 많은 사람이 2015년부터 디지털 성폭력을 전개해왔던 단체의 역사가 써 내려 가져야 한다고, 그럴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이에 나는 어렵지 않다고 답했다

 나는 단체가 해왔던 일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모든 것들을 데이터로 남겨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난잡한 데이터로 펼쳐져 있는 데이터들을 문장과 서사는 나의 내면에서 문장으로 나오지 못하고 만다.

 문득 내가 지금까지 단체와 함께 지내온 이야기를 하길 두려워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의 이야기에는, 성공, 행복, 기쁨도 있었지만 넘어지고 다치고 아픈 순간에 들이 존재했다. 아니,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쏟아져 내리는 시선과 사건 속에서 아픔 속에서 버텨왔고. 실패하기도 했고 결국 서로의 탓을 하며 미워하기도 했고 질투하기도 했고 고집을 부리고 욕심을 부리기도 했다.


 내가 지나온 시간이지만 어쩌면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그 기억들을 두려워했고 복기하는 것을, 써 내려가는 것을 외면했다. 하지만 그 다치고 아픈 시간을 돌아보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는 어떻게 또 다른 목적지를 정하고 전진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도착지에 도착한 기쁨을 느끼기도 전에, 지나온 길에 넘어지고 쓸려 엉망이 된 몸과 마음을 부여잡고 울부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시밭길을 지나며 박힌 가시는 뽑히지 않은 채 나를 갉아먹는다. 나는 주저앉아 지나온 길을 인지하지도, 앞으로 길을 생각하지도 못한 채 절망하고 만다.

 나는 엉망이 되어 주저앉은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사람들을 원망했다. 주변을 돌아보지 않은 채 엉망으로 상처 받은 나만을 보고 자신을 질책하고 울분에 찬 고함을 지른다.

  그러다 문득 깨닫고 만다. 달리지 않은 사람은 넘어지지 않는다. 나의 넘어짐이 비웃음이 되더라도, 나는 뛰었다.

 그래, 나는 뛰었다. 뛰지 못한 상황에는 기어서라도 앞으로 나아갔다. 온몸이 쓸려 엉망진창이 될지라도. 맨손으로 가시덩굴을 헤쳐 손바닥 가득 가시가 박혔을지라도. 먼지투성이가 되어 그것이 비웃기는 꼴이 되었을지라도 나는 부끄럽지 않다.

  그제야 주위가 보였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넘어져서 아파하고 있는 사람도 앞서 악착같이 달려 나가는 사람들도 두려움에 뒤로 도망치는 사람들도. 서로를 밀치고 다치고 넘어지는 모습도.

  자각하고 보니 어느새 같은 길목에서 지나치는 참 많이 늘었다.

 그들의 목적지가 어딘지 모르지만 우리는 같은 지금 방향을 걷고 있다. 내가 그려왔던, 꿈꿔왔던 좋은 일이지만 이곳은 비좁고 험하기에, 한 발 뒤에 낭떠러지가, 위험한 장애물이 있기에 부딪힘은 치명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연거푸 부딪히고 서로를 상처 입히고 만다.

 나는 언제쯤 나를 밀치고 지나간 그들을 동행자로서 다시 사랑하게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몇 명의 사람들을 밀쳐냈을까? 어쩌면 내가 눈살을 찌푸렸던 그들처럼 그저 자신의 억울함에 악을 세우는 그런 사람이 되어있지 않을까?

 나는 언제쯤 나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될까?

 나의 흉터와 상처들을 바라보고 인제야 원망과 부끄러움이 아닌 슬픔을 느낀다. 슬픔을 느끼고 나서야, 살아있음을 느낀다. 살아있음을 느끼고 나서야 혼자가 아니었음을, 응원하고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나와 발을 맞춰 함께하는 뛰고, 걷고 있던 이들이 있었음을 느끼고 만다.

 그들과 함께 아팠던 것을, 또 그들이 있었기에 나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음을, 어리석게도 그제야 감사하고 행복해한다.

 언제부터, 나는 “함께” 달리고 있었다는 것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대한 감사를 잊고 말았을까?

 처음에는 그저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했다. 하지만 언젠가 오로지 앞서 달려야 하는 것이 나에게 남은 마지막 일인 것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길을 생각하지도 않고 무작정 달리기만 시작했다.

 무작정 달리는 나에게 박자를 맞추어 주지 못한다고 질책하고, 잠시 쉬는 나를 미워할까 두려워하고. 함께 걷던 그들의 박자도, 그들의 걸음도 이해하지 못하다 결국 엉망이 되어 주저앉은 자신을, 그리고 타인을 원망한다.

 하지만 동료들은 이런 못난 나일지라도, 나의 배려 없었던 걸음에도 지친 기색을 감추며 괜찮다 고생했다 말하며, 자신들의 짐 위에 내가 안고 있던 짐을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간다.

 나와 단체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모두 각자의 길에서, 각자의 세상에서 조금은 다른 방향이지만 그들의 길을, 그들만의 새로운 길을 전진해왔다. 각자만의 방식으로 싸우고 부딪혔다. 친구들 사이에서, 직장 속에서, 학교 속에서, 가정 속에서 당신은 부딪혔기에 다쳤고 생존했기에 아프다.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세계를 바꾸기 위해 얼마나 애써왔던가.

 주저앉아 울부짖던 나처럼. 그들도 상처를 추스르지 못한 채 그저 절망의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자전거 여행과 같이 모두의 종착지가 다른 이 세상 속에서, 어쩌면 성공이란 제일 앞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목적지가 아니더라도 목표를 이루었음을 말한다.

 우리가 어떤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 길을 헤매는 것처럼 무언가의 성공은 수많은 실패 속에서 태어난다.  

 하지만 사회 속에서 사람들을”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이 두 가지로 사람을 구분하기에,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실패와 상처에 대하여, 헤맴에 이야기하는 것을 자신을 돌아보는 것을 공포로 느끼고 만다.

 우리는 어느새 목적을 까맣게 잊고 앞서 간 사람들을 추월하기 위해 달린다. 그렇기 때문에 옆을 지나치는 사람을 볼 때마다 공포스럽다. 넘어진 순간순간이 원망스럽다.

그렇게 끝없이 달려야 했던 우리에게 야망이 없었을까? 아니, 당신과 나 ‘우리’는 어쩌면 누구보다 야망을 꿈꿨고 치열하게 달렸다. 그렇기에 아팠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기 있다.

 그제야 생각했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전진의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돌아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는 지금 겪고 있는 이 아픔이 실패하고 생각하지만. 사실 어쩌면 당신은, 우리는 목적지를 이미 지나쳤거나 그 누구보다 목적지에 가까운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목적지를 모르고 헤맴을 겪었을지라도. 반대로 가고 있었을지라도, 우리는 목적지를 찾기 위한 헤맴을 겪었을지도 모른다고. 지금 우리는 괜찮다고.

우리는 실수로 실패로 배우는 인간이니까.

 잠시 멈춰서 돌아보고 다시 목적지를 정하자. 도착한 그곳이 내가 찾던 그곳이 아닐지라도, 다시 떠나면 된다.

나는 한참을 길 중앙에 주저앉아 있다가 인제야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과 앞서 지나간 누군가의 발자취를 발견한다.

 나는 그 발자취를 보며 순례자의 심정으로 또 다른 여정을 준비한다.

그리고 이 길을 지나갈 누군가를 위해 이정표를 남긴다.

어쩌면 나의 글들은, 나의 질문들은 내가 평생 안고 갈 나에 대한 성찰이자, 반성의 전진의 대한 다짐이다. 주저앉아있던 나를 다독여주고 힘을 주었던 사람들에게 감사와 존경의 말씀을 전하며.  

  나 또한 성공을 꿈꾸며 치열하게 살아간 여성이자 반성폭력 운동가이자 성폭력 생존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며 야망을, 성공을 꿈을 찾고자 하는 여성들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글을 써 나간다. 

‘이정표’  그래, 나는 글을 쓰기로 했다.

소라넷 폐지운동 연표